오늘도 공장은 돌아가고, 별들은 새벽이 오기도 전에 사라진다. :: 공익활동가, 우리도 노동자다.
작성자 : public 작성일 : 2025.01.14 조회수 : 4
- 작성자 : 장지혁 활동가
- 이 글은 2019년 대구시민공익활동지원센터에서 발간한 '공익활동가, 우리도 노동자다.'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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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공장은 돌아가고, 별들은 새벽이 오기도 전에 사라진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잔인한 폭정과 전쟁, 학살로 비극적으로 시작했지만,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한 발, 한 발 힘겹게 내딛어 가면서 시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를 향해서 우직하게 전진해 왔다. 많은 이가 알고 있듯이 그 지난하고 간난한 길에 셀 수 없는 희생자들이 발생했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희생자들의 피에 기반으로 발전했다. 마치 산업화가 많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되었듯이 우리 사회는 지난 과정 속에서 땅속으로 꺼져버린 듯 사라진 사람들을 투명화시킨 채 방황하고 진전되었다.
누군가는 세상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그 누군가들은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는 전진하고 있으며 인권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는 심각한 불평등, 차별, 소외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소수자들을 향한 혐오는 그치지 않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은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와 시민의 기본권은 여전히 나아갈 길이 요원해 보이며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렇지만 사회적 소수자들과 함께하며 이 땅에서 민주와 인권, 평등, 자유, 정의와 같은 고리타분한 테마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운동가, 상근자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인데, 보통 활동가라고 불리운다. 이들은 동성로, 광화문 같은 다양한 거대한 집회의 현장 뿐 아니라 밀양, 청도, 성주의 현장들, 구미와 성서공단의 어느 한 귀퉁이는 물론이거니와 보통사람들은 알 수 없는 조명 한 점 없고 오토바이 한 대도 지나가기 어려운 골목의 쪽방에까지 자신의 몸이 있거나 시선이 가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을 조직하고, 현장의 아픔을 알리고,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어떤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며,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한국 사회 운동의 전통에서 활동가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 내부에서만 존재할 뿐 사회적인 이슈도, 해결해야 할 문제도 아니었다. 민주주의와 시민권, 평등과 자유의 후퇴를 막아내고 우리 사회가 조금씩 나가려고 하는 사회적 움직임이 이들의 땀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아무도 그들의 땀을, 피를, 쓰러짐을 주목하지 않는다.
나는 자주 만나는 어떤 활동가와 하는 농담으로 서로를 사장으로 부르고 단체나 사무실을 공장으로 포현하고는 한다. 전국적이고 큰 규모를 자랑하는 단체들도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의 단체들을 노동관계법상 5인 이하의 영세사업장의 규모이다. 그래서 종종 공장은 잘 돌아가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은 안부를 묻는 것뿐만 아니라 당신은 잘 살고 있는지 당신의 활동이 어떤지 묻는 셈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네의 공장들은 열심히 돌리면 돌릴수록 수렁에 빠지는 만성적 적자에 시달리는 이상한 공장이다. 더욱 황당한 것은 성과를 거둔다 할지라도 영업이익은 전혀 나지 않는 신기한 사업장이기도 하다. 마치꼬바 공장들 같이 잦은 야근과, 특근 노동, 그 속에 있는 사람을 갈아 넣음에도 한 치의 전망도, 희망도, 보람도, 이익도 느낄 수 없는 내일이 두려운 그런 공장들이다. 그리고 대게 활동가는 그 속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활동가들은 카페인, 니코틴, 알코올 같은 각종 화학물질에 자신의 몸을 맡긴 채 산다. 어느 활동가는 나에게 말했다. 하루에 커피를 4잔을 마시는데도 잠이 온다고 다른 활동가는 나에게 알코올이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했다. 한국사회의 일반적인 사회모습과 크게 다른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살펴보면 심각하다. 만성질환은 기본이며, 암, 심뇌혈관 질환 등이 너무나 많다. 보통 중년에서 발생한다는 사회적 시각과는 달리 이 업장은 빠르면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사이에 발생하고 있다. 물론 통계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 공장들은 사대보험에 들어가지 않는 비율도 꽤나 차지하며, 산재신청도 못하는 경우도 너무도 많다. 생각해보시라 경찰에게 맞았다고 산재신청을 할 수 있을까? 농성장에서 밤을 새웠다고 산재신청을 할 수가 있을까? 실제로도 그런 경우를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물론 활동가가 노동자가 아니라는 근거와 주장도 많다. 어느 고명하신 리론가의 말씀처럼 활동(Action)은 노동(Labor 혹은 Work)와는 구분되는 인간의 행위이며, 인간만이 가지는 고유의 창조적인 영역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도 계시고, 다른 유명하신 리론가께서는 노동자는 물화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데 활동가는 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니 노동자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아이러니하게도 활동가들의 존재자체가 노동자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근로계약서, 취업규칙, 임금대장과 같은 형식적 장치의 부재와 휴게시간과 휴일도 제대로 없으며 최저생계비는 커녕 최저임금 언저리에서 많은 시간을 활동을 통해 쏟아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자체가 스스로 활동가로 정체화 하지 않으면 서 있기조차 힘든 것이기 때문에, 활동가의 존재자체가 노동자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밤이 계속되어지는 어느 날 어느 선임활동가는 나에게 말했다. "활동가는 활동을 안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슬픈 말이었다. 그 말의 맥락은 활동가를 대량으로 해고한 어느 교수에 대한 대응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맥락이었지만 매우 슬펐다. 요즘은 사직서를 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으라는 것이 유행이라지만 활동가는 갈 곳이 없다. 어느 고용주가 예민하고, 프로불편러에 목소리는 잘 내는 활동가 출신을 고용하거나 계약을 맺겠는가. 활동가의 삶을 살다보면 어느 순간 돌아갈 수 없는 시점이 생기고야 만다. 송곳의 구고신의 말처럼 남들 떠날 때 같이 떠나야 표시도 안 나고 좋지만, 지금은 어느 단체의 어느 활동가가 활동을 접으면 그 구멍들이 매우 크게 자리 잡고 그 것을 메우기가 쉽지가 않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 해답을 찾는 길은 어려우면서도 쉽다. 스스로를 정직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쉬쉬하기 보다는 널리 알려야 한다. 그래야 한다. 병을 주변에 알려야 원활한 치료과정에 돌입할 수 있듯이. '인권단체에 인권이 없고, 민주주의 단체에 민주주의가 없다'는 이미 고전적인 농담이 되어버렸다. 나는 오히려 요즈음은 그림자 노동, 혹은 그림자 노동자라고 자조한다. 우리는 눈에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저출산에 대응하는 정부와 몇몇 정당들의 정책이 우스운 이유는 현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만 그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주변에 있는 활동가의 사회적 재생산(활동가 삶의 재생산, 활도가 층의 재생산 둘 다를 포함)이 위기에 처하고 대책이 나오지 않는 것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원인과 과정은 침묵한 채 대증요법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즘도 둘러보면, 이곳저곳의 공장들이 열심히 돌아간다. 하지만 그 공장을 돌아가게 했던, 반짝이던 많은 별들이 병상에 누워 있거나, 내면의 정신적 공격에 시달리며 사라져 가고 희미해져 간다. 이탈리아의 전설적 운동권이자 한 지식인은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써 낙관하라'했지만 활동가의 삶은 '이성으로 낙관하더라도 의지로써 비관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그동안 스스로 외면했던 우리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당당하게 말하자. 기계도 고장나면 고쳐서 쓰고 수리도 해서 쓰는데 우리사회가 활동가를 대하는 취급이 달면 삼키고 쓰면 버리는 그런 1회용 소모품처럼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가장 어두울 때는 새벽이 가까이 올 때라고 했던가. 하지만 불행하게도 '오늘도 공장은 돌아가고 별들은 새벽이 오기 전에 쓰러진다.' ????